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일 중앙당 (문단 편집) ==== 역효과: 가톨릭중앙당의 급성장 ==== >[[1870년대]] 중반에 가서, 자유주의 좌파는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이 운동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갈수록 급진적인 반교회 운동의 조치는 독일 보수주의에서 '성직자' 분파를 형성한 많은 프로테스탄트에게 불안감을 주었다. 이들은 '문화투쟁'의 진정한 희생자는 가톨릭 교회나 가톨릭 정치가 아니라 종교 자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 >-크리스토퍼 클라크,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91190853026&orderClick=LEa&Kc=|《강철왕국 프로이센》]], 박병화 옮김 (서울: 도서출판 마티, 2020), 765-766쪽 그러나 문화투쟁은 여러 방향에서 비판을 받게 된다. 자유주의 좌파 입장에서 이는 기본권의 침해였고, 프로테스탄트 입장에서는 도저히 강 건너 불 구경할 처지가 못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스마르크의 운동은 정치사회적 세력으로서 가톨릭을 무력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가톨릭 세력을 키워주었다. (중략) 아마 비스마르크의 실패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프로이센의 (그리고 많은 독일 지역의) 가톨릭 정당이라고 할 가톨릭중앙당(Zentrumspartei)의 눈부신 성장일 것이다. 물론 비스마르크는 적어도 프로이센 의회 내에서 이들을 고립시키는 데는 (적어도 일시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제국의회 선거에서 독일 유권자의 가톨릭중앙당 지지자가 늘어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1871년에 프로이센 가톨릭 신도들은 23퍼센트만 중앙당을 지지했지만, 1874년에는 이 비율이 45퍼센트로 늘어났다. 비스마르크의 '문화투쟁'이 빚은 참화에 상당 부분 덕을 본 중앙당은 사회 환경에 깊이 뿌리박은 상태에서 이때까지 정치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던 가톨릭 신도들을 동원하고 당과 정치의 전선을 확대하면서 "일찌감치 세력을 떨쳤다."[* (책 속 주석)Jonathan Sperber, ''The Kaiser's Voters. Electors and Elections in Imperial Germany'' (Cambridge, 1997); Margaret Lavinia Anderson, ''Practicing Democracy. Elections and Political Culture in Imperial Germany''(Princeton, NJ, 2000), pp. 69-151.] 다른 정당은 비가톨릭 진영에 포진한 그들의 지지자들을 규합하면서 점점 중앙당을 따라 했지만, 1912년에 가서야 이들은 중앙당의 대도약을 따라 잡을 수 있었다. 이때도 중앙당은 사민당 다음으로 제국의회에서 세력이 막강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당과 보수당 소속의 의원 대다수는 여전히 사민당과 손을 잡는 데 신중했기 때문에 중앙당은 가장 강력한 원내 세력이 되었다. 이런 결과는 비스마르크가 1871년에 문화투쟁을 전개했을 때 의도했던 것이 아니었다. >---- >-크리스토퍼 클라크,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9791190853026&orderClick=LEa&Kc=|《강철왕국 프로이센》]], 박병화 옮김 (서울: 도서출판 마티, 2020), 770쪽 더군다나 피해 당사자인 가톨릭 신자들이 가톨릭중앙당으로 뭉치는 효과를 낳았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비스마르크는 자기가 전혀 원하지 않은 결과를 스스로 야기한 꼴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